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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호프 스포 감상기 — 156분의 방탄 커피를 층별로 마셔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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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upamine
2026년 7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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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호프 스포 감상기 — 156분의 방탄 커피를 층별로 마셔보았다

이 글에는 영화 '호프'의 결말을 포함한 모든 스포일러가 있다. 아직 극장에 가지 않았다면, 여기서 돌아 나가는 편이 좋다.

10년이다. '곡성' 이후 나홍진이라는 이름이 다시 극장 간판에 걸리기까지 걸린 시간. 그 사이 이 감독의 신작은 하나의 사건으로 예약되어 있었다. 제작비 700억,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 황정민·조인성·정호연에 마이클 패스벤더와 알리시아 비칸데르 부부가 한국 영화 최초로 동반 출연한다는 캐스팅, 그리고 156분이라는 러닝타임. 숫자만 늘어놓아도 야심의 크기가 가늠된다.

그런데 극장을 나서며 내 머릿속을 채운 건 경탄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이 거대한 잔에 담긴 것은 대체 무엇이었나. 노스포 후기에서 나는 이 영화를 "정체 불명의 벤티 사이즈 방탄 커피"라고 불렀다. 에스프레소와 코코넛 밀크와 기버터와 달고나가 한 잔 안에서 끝내 섞이지 않은 채 층층이 떠 있는 음료. 이제 그 잔을 한 층씩 내려가며 마셔볼 차례다. 미리 말해두자면, 이것은 조롱이 아니라 부검이다. 그리고 부검은 애정 없이는 하지 않는 일이다.

'호프' 메인 포스터. 사진 제공: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호프' 메인 포스터. 사진 제공: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1. 한 시간의 유예 — 숨기기의 경제학

영화가 시작되고 외계 생명체가 제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대략 한 시간이 걸린다.

전략 자체는 유서 깊다. '죠스'의 상어는 영화가 반이 지나도록 지느러미만 보여줬고, '에이리언'의 제노모프는 어둠 속 실루엣으로 관객의 상상력을 착취했다. 보이지 않는 괴물이 가장 무섭다는 것은 장르의 오래된 공리다. 나홍진 자신이 '곡성'에서 이 공리의 대가였다. 그 영화에서 우리는 끝까지 무엇을 봤는지 확신할 수 없었고, 그 불확신이 곧 공포였다.

문제는 '호프'의 한 시간이 지연이 아니라 반복이라는 데 있다.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신고, 무너진 담벼락, 찢겨 죽은 사람들, 어디선가 들려오는 괴성, 그리고 실체 없는 추적. 이 패턴이 거의 같은 강도로 되풀이된다. 지연은 정보를 조금씩 흘리며 긴장의 이자를 불리는 기법인데, '호프'는 같은 액수를 계속 재예치만 한다. 이자가 붙지 않는 공포는 시간이 지나면 원금마저 잠식된다. 극장 어둠 속에서 나는 하품을 했다. 나홍진의 영화를 보다가 하품을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이 한 시간을 더 견디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인물들의 선택이다. 위험이 있는 쪽으로 굳이 걸어 들어가고, 흩어지면 안 될 때 흩어지고, 확인하지 않아도 될 것을 확인하러 간다. 게임 '언틸 던'을 해본 사람이라면 이 감각을 안다. 화면 앞에서 "거길 왜 열어"라고 중얼거리게 만드는, 공포 장르 특유의 멍청한 선택의 연쇄. 다만 '언틸 던'은 그 선택을 플레이어에게 쥐여주며 장르의 클리셰를 자의식적으로 갖고 놀았다. '호프'의 인물들은 그 선택을 스스로, 진지하게, 반복해서 한다. 클리셰를 연주하는 것과 클리셰에 연주당하는 것은 다르다.

공정을 기하기 위해 덧붙이면, 이 반복이 전혀 무의미하지는 않다. 호포항이라는 공간의 지리와 인물들의 관계망이 이 한 시간 동안 깔린다. 나중에 차량 추격이 그토록 잘 읽히는 것도 이 시간에 좁은 골목과 부두의 동선을 익혀둔 덕이 크다. 그러니까 이 한 시간은 낭비가 아니라 투자라고 변호할 수도 있다. 다만 투자라면 수익률을 물어야 한다. 공간 학습에 필요한 시간은 넉넉잡아 삼십 분이면 족했다. 나머지 삼십 분은, 같은 수업의 재수강이었다.

산으로 향하는 사냥꾼들. 실체 없는 추적이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진다. 사진 제공: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산으로 향하는 사냥꾼들. 실체 없는 추적이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진다. 사진 제공: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2. 괴물의 얼굴 — 어디서 본 듯한 이형(異形)

그렇게 한 시간을 유예한 끝에 드러나는 괴물의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낯설지 않다.

인간을 닮았으되 비율이 어긋난 신체, 관절이 뒤틀린 듯한 움직임, 표정이라 부르기 어려운 얼굴. 나는 객석에서 '진격의 거인'을 떠올렸고, 아마 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기괴한 나신의 인간형 거체가 마을을 헤집는 이미지의 계보에서 이 영화의 크리처 디자인은 분명 그 그림자 안에 있다. 참고와 표절은 다른 문제이고, 창작에서 영향은 죄가 아니다. 다만 한 시간을 감춰둔 끝에 공개된 카드가 관객이 이미 아는 패라면, 그 유예의 값어치는 어디서 찾아야 하나.

CG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솔직히 말하면 매끄럽지 않다. 700억이라는 숫자를 생각하면 더 그렇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이 영화의 진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홍진은 애초에 픽셀의 밀도로 승부하던 감독이 아니다. '곡성'의 공포는 렌더링 품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르는 상태 그 자체에서 나왔다. CG의 질감은 용서할 수 있다. 용서하기 어려운 것은 그 괴물이 등장한 이후에도 영화가 긴장의 새 층위를 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베일을 벗기는 데 모든 공력을 쓴 마술사가, 정작 벗긴 다음의 마술을 준비하지 않았다.

유리창 너머로 바깥을 살피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동안이 가장 무섭다. 사진 제공: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유리창 너머로 바깥을 살피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동안이 가장 무섭다. 사진 제공: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2.5 나홍진이라는 장르 — 세 편의 유산과 네 번째 질문

잠시 계보를 짚고 가자. 이 실망의 크기를 설명하려면 기대의 크기부터 설명해야 하니까.

'추격자'(2008)는 시스템이 무능할 때 개인의 절박함이 어디까지 질주하는지를 보여준 데뷔작이었다. '황해'(2010)는 그 질주를 국경 밖까지 밀어붙이며 스케일과 통제력을 동시에 증명했다. 그리고 '곡성'(2016). 나는 지금도 이 영화를 2010년대 한국 영화가 도달한 가장 불온한 성취 중 하나로 꼽는다. 무엇을 믿을지 끝내 알려주지 않으면서도 두 시간 반을 장악하는 완력. 현혹되지 말라는 대사가 영화 자체의 작동 원리였던 작품.

이 세 편의 공통점은 통제였다. 나홍진의 영화는 언제나 과잉의 인상을 주지만, 그 과잉은 설계된 과잉이었다. 관객이 어디서 숨을 참고 어디서 내쉴지가 초 단위로 계산되어 있었다.

'호프'가 아픈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10년 만에 돌아온 이 감독의 네 번째 장편에서, 처음으로 과잉이 설계를 초과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장르를 겹쳐 쌓는 야심은 '곡성'보다 크지만, 그 층들을 하나의 호흡으로 묶던 손아귀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재능이 사라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차량 추격 시퀀스가 그 반증이다. 다만 10년치 야심이 한 잔에 다 들어가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잔이 그것을 감당하지 못했다. 야심은 재능의 친구지만, 퇴고의 적이 되는 순간이 있다.

3. 욕설의 인간, 침묵의 외계인 — 뒤집힌 문명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설계는 인간과 외계인의 대비다. 그리고 가장 진부한 것도 바로 그것이다.

호포항의 인간들을 보자. 시종일관 쌍욕이 오가고, 똥 이야기가 농담의 최전선에 있으며, 위기 앞에서 단결은커녕 각자의 욕망과 어리석음으로 사태를 악화시키는 집단. 카메라는 이들을 애정 없이 관찰하지 않지만, 존엄하게 그리지도 않는다. 반면 게르투 행성에서 온 존재들은 어떤가. 인간이 선제공격하기 전까지 그들은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 그들이 지구를 헤집는 이유는 침략이 아니라 제 새끼를 찾기 위해서다. 새끼가 위협받자 그들은 인간을 유인해 소탕하는 전술적 지혜까지 보여준다. 짐승처럼 보였던 쪽이 문명이고, 문명인 척했던 쪽이 짐승이라는 역전.

의도는 선명하다. 지적 생명체가 인간뿐이라는 오만을 버려라. 우리가 괴물이라 부르는 것의 자리에 서보라. 인류학적 겸손을 요구하는 이 주제 자체에 반대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 역전이 2026년의 관객에게 얼마나 새로운 소식이냐는 것이다. '미지와의 조우'가 1977년, '아바타'가 2009년이다. 침략자인 줄 알았던 존재가 실은 부모였고 피해자였다는 반전은 이제 반전이 아니라 장르의 기본 문형에 가깝다. 156분의 대작이 도달한 결론이 "외계인도 부모다"라면, 관객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딘가 허전해진다. 노스포 후기에서 내가 "암 세포도 사람이다"라는 문장을 소환한 것은 그 허전함 때문이었다. 명제가 틀려서가 아니라, 그 명제까지 가는 길이 너무 낡아서.

덧붙이자면, 외계인의 언어에 자막을 깔아주는 선택은 이 대비 구조를 위해 필요했을 것이다. 그들의 내면을 보여줘야 역전이 성립하니까. 그러나 그 순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는 공포의 마지막 지지대가 무너진다. 이해할 수 없어서 무서웠던 것이 번역되는 순간 그저 말이 통하지 않는 이웃이 된다. 주제를 위해 공포를 지불한 셈인데, 나는 그 환율이 영화에 유리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 가지는 인정해야 공정하다. 이 대비를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쌓는 연출 자체는 성실하다. 외계인들이 인간을 유인해 소탕하는 시퀀스는 그들의 지성을 대사 한 줄 없이 증명하고, 인간들이 저지르는 오판의 목록은 그 자체로 반문명론의 각주가 된다. 설계도는 좋다. 문제는 그 설계도가 반세기 전에 특허가 만료된 도면이라는 것뿐이다.

캐릭터 포스터 6종. 호포항의 인간 군상. 사진 제공: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캐릭터 포스터 6종. 호포항의 인간 군상. 사진 제공: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4. 156분의 살과 뼈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156분이다. 그리고 나는 이 안에 훌륭한 100분짜리 영화가 갇혀 있다고 생각한다.

증거가 있다. 차량 추격 시퀀스다. 성애가 운전대를 잡고 호포항의 좁은 길을 내달리는 이 장면에서 영화는 비로소 제 심박수를 찾는다. 공간의 합이 정확하고, 카메라는 어디를 봐야 할지 알며, 소리와 속도가 맞물린다. 나홍진이라는 감독의 근력이 어디 갔나 싶던 차에, 여기 있었구나 싶어지는 대목. 이 시퀀스만큼은 극장 관람의 값을 한다.

그런데 이 훌륭한 시퀀스조차 길다. 명백히 길다. "우와"가 "아직도?"로 바뀌는 임계점이 있고, 이 영화는 그 지점을 지나고도 한참을 더 달린다. 좋은 장면을 늘이는 것은 나쁜 장면을 늘이는 것보다 교묘하게 해롭다. 관객이 느끼는 피로의 책임을 그 장면의 훌륭함이 뒤집어쓰기 때문이다.

유머도 같은 병을 앓는다. 위치는 맞다. 긴장이 조여든 자리마다 이완의 밸브가 정확히 배치되어 있고, 그 설계도는 눈에 보인다. 그러나 밸브를 너무 세게, 너무 오래 연다. 참혹한 죽음 직후에 들어오는 개그가 톤을 부수고, 그 개그마저 철 지난 문법이라 두 번 부순다. 슬로 모션이 낀 코믹 연출이 나올 때마다 나는 감독의 의도와 관객석의 온도 사이에서 벌어지는 간극을 실시간으로 측정하고 있었다.

한 시간. 그것이 내 진단이다. 도입의 반복 패턴에서 30분, 추격과 유머의 과잉에서 20분, 후반부 설명에서 10분. 그렇게 덜어낸 100분짜리 '호프'는 아마 올해의 한국 장르 영화가 됐을 것이다. 156분의 '호프'는, 그 100분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영화다.

출장소장 범석(황정민). 이 난장판의 유일한 무게중심. 사진 제공: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출장소장 범석(황정민). 이 난장판의 유일한 무게중심. 사진 제공: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5. 성애라는 예외 — 나사 빠진 세계에서 멀쩡하다는 것

정호연이 연기하는 순경 성애는 이 영화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일 것이다.

먼저 변호부터 하자. '호프'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나사가 빠져 있다. 과장된 사투리와 욕설, 이상한 고집, 엇나간 타이밍의 농담. 이 앙상블 속에서 성애 혼자 정색하고 리얼리즘 연기를 했다면 그게 오히려 이물질이었을 것이다. 4차원처럼 붕 뜬 성애의 톤은, 이 뒤틀린 세계의 일원이 되기 위한 감독의 조율로 읽힌다. 여기까지는 의도이고, 의도로서 이해한다.

그러나 이해와 설득 사이에는 강이 흐른다. 1970년대 비무장지대 인근 항구 마을의 순경에게서 4차원 여전사의 아우라가 피어오를 때, 나는 캐릭터가 아니라 캐스팅과 연출의 손자국을 보게 된다. '오징어 게임' 이후 첫 영화 주연이라는 부담 속에서 정호연은 주어진 옷을 성실히 입었다. 문제는 그 옷의 재단이다.

그리고 사격 실력. 설정상 성애는 운전과 총기에 능한 인물이라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녀는 능숙함을 넘어 천하제일 사격수가 되어간다. 압도적이어서 인간이 대적할 수 없다던 존재들 앞에서, 주요 인물들은 좀처럼 죽지 않는다. 혈청이라도 맞은 전사들처럼. 누가 끝까지 살아남을지가 중반부터 훤히 보이는 영화에서 서스펜스는 성립하지 않는다. 화면에서는 계속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나는 이미 안전 명단을 알고 있다. 그때부터 관람은 긴장이 아니라 확인 작업이 된다.

생존 공식의 문제는 배우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하자. 황정민은 범석에게 이 영화에 흔치 않은 실감의 밀도를 부여하고, 조인성의 성기는 금전욕과 인간미 사이의 애매한 자리를 그럴듯하게 지킨다. 문제는 이들이 아무리 절박한 표정을 지어도, 각본이 이들에게 발급해준 생존 보험 증서가 관객석에서 훤히 보인다는 데 있다. 배우는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는데 관객은 그가 죽지 않을 것을 안다. 이 낙차만큼 배우에게 잔인한 연출 환경도 드물다.

총을 겨누는 순경 성애(정호연). 어느새 천하제일 사격수. 사진 제공: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총을 겨누는 순경 성애(정호연). 어느새 천하제일 사격수. 사진 제공: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6. 다이얼 전화기의 강박 — 시대라는 알리바이

'호프'의 배경이 과거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핸드폰이다. 오늘날의 호포항이었다면 괴물 출현 10분 만에 누군가의 세로 영상이 SNS에 올라가고, 한 시간 뒤엔 헬기와 특수부대와 유튜버들이 도착했을 것이다. 고립과 무지가 연료인 이야기에게 스마트폰은 재앙이다. 그래서 장르 영화들은 꾸준히 과거로, 오지로, 통신 두절로 도망쳐왔다. 이것은 정당한 선택이고, 비무장지대 인근이라는 지리 설정과 맞물려 '호프'의 고립은 구조적으로는 탄탄하다.

문제는 화법이다. 영화는 자신의 시대 설정을 관객이 잊을까 봐 불안한 사람처럼 군다. 다이얼 전화기가 클로즈업되고, 빛바랜 간판이 프레임 안에 들어오고, 조인성이 전신주에 매달린 나무 상자 비상전화를 돌리는 장면이 이어진다. 한두 번이면 세계의 질감이지만, 이렇게 잦으면 호소가 된다. "여기 옛날이에요, 그러니까 아무도 도우러 안 와요, 아시겠죠?" 소품이 설정을 설명하기 시작하면 미술은 미술이기를 멈추고 각주가 된다. 관객을 믿지 못하는 디테일은 아무리 정교해도 소음이다.

비교하자면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도 같은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 영화 역시 통신과 과학수사가 무력한 시대여야만 성립하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거기서 시대는 소품이 아니라 공기였다. 등화관제 사이렌과 논두렁의 어둠은 설정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 세계로서 존재했고, 관객은 어느새 그 안에 들어가 있었다. '호프'의 1970년대는 반대로 자꾸 자신을 가리킨다. 세계가 되지 못한 시대는 배경이 아니라 알리바이로 남는다.

전신주의 비상전화. 영화는 '옛날'임을 잊을 만하면 상기시킨다. 사진 제공: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전신주의 비상전화. 영화는 '옛날'임을 잊을 만하면 상기시킨다. 사진 제공: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구형 경찰차 안의 성애와 범석. 시대는 소품으로 증명된다. 사진 제공: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구형 경찰차 안의 성애와 범석. 시대는 소품으로 증명된다. 사진 제공: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7. 끝나지 않은 결말 — 2부의 역설

이제 결말을 이야기하자.

하늘을 덮고 있던 모선이 대폭발하며 추락한다. 아들의 주검과 불타는 모선을 목격한 조르(알리시아 비칸데르)와 마베이요(마이클 패스벤더)는 절망하고, 황후 조르는 마베이요에게 명령한다. "운명을 바꾸라." 살아남은 인간들은 여전히 영문을 모른 채 아수라장을 도망친다. 그리고 우리는 깨닫는다. 제목의 HOPE는 처음부터 인간의 희망이 아니라 그들의 희망이었다는 것을.

구조로서는 아름답다. 사냥꾼과 사냥감의 자리를 바꾸고, 관객이 응원하던 생존이 실은 누군가의 비극이었음을 드러내며, 통쾌함 대신 가책을 남기는 마무리. 나홍진 특유의 검은 유머가 이 아이러니에 마지막 옷을 입힌다.

그런데 영화는 이 아이러니를 한 번 보여주고 물러나지 않는다.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마치 관객이 못 알아들었을까 봐 결말의 의미를 자꾸 되짚어주는 것처럼. 그리고 그 반복 속에서 나는 다른 것을 보고 말았다. 감당할 수 없이 커진 이야기를 끝맺지 못한 창작자가, 마무리 대신 여운을 무한 증폭시키는 모습을. 풍선을 묶지 못하니 계속 불고 있는 것이다.

가장 역설적인 지점은 이것이다. 이 영화는 명백히 2부를 요구한다. "운명을 바꾸라"는 명령은 대답되지 않은 채 허공에 떠 있고, 게르투인들의 서사는 시작만 하고 끝나지 않았다. 우주적 규모의 비극으로 확장된다던 이야기는 확장의 문턱에서 크레딧을 올린다. 10년을 기다리게 한 감독의 완결된 신작을 보러 갔는데, 극장을 나서며 다음 편 개봉일을 궁금해하게 만드는 영화라니. 이것은 떡밥의 성공이 아니라 완결의 실패다. 열린 결말과 끝내지 못한 결말은 다르다. 전자는 선택이고 후자는 증상이다.

혹자는 이것을 유니버스의 개막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실제로 그런 기획이라면 차라리 이해는 간다. 다만 그렇다면 관객과의 계약서를 다시 써야 한다. 10년을 기다린 관객에게 완결된 한 편 대신 개막전을 내밀 거라면, 최소한 그 개막전 자체는 자립해야 한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속편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두고도 그 자체로 완전했다. '호프'는 반대다. 속편이 나와야만 이 영화의 미결이 사후적으로 용서받는 구조. 작품의 완성도를 아직 존재하지 않는 다음 작품에 저당 잡힌 셈이다.

제79회 칸 영화제 레드카펫의 감독과 배우들. 10년 만의 귀환이 향한 무대. 사진 제공: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79회 칸 영화제 레드카펫의 감독과 배우들. 10년 만의 귀환이 향한 무대. 사진 제공: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8. 거울로서의 '호프' — 어느 창작자의 반성문

여기서부터는 평론이 아니라 고백이다.

나는 소설을 쓴다. 그리고 '호프'를 보는 156분 동안, 스크린보다 내 원고를 더 자주 생각했다. 저 과잉이, 저 반복이, 저 끝맺지 못함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었다. 감독과 작가의 자리에서는 절대 보이지 않던 문제가, 관객과 독자의 자리에 앉는 순간 이토록 선명하게 보인다는 것. 그것이 이 영화가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이자 가장 아픈 청구서였다.

나홍진의 성격이 나와 비슷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자기가 '완성'한 작품을 다시 보지 못하는 타입. 출품 직전까지 원고를 부여잡고 있다가, 마감이 오면 퇴고가 아니라 해방하듯 놓아버리는 타입. 창작의 고통과 퇴고의 힘겨움에 눈알이 빠질 지경이 되다가도, 일단 완성됐다고 선언한 순간 그 작품을 두 번 다시 마주하지 않는 타입. 물론 이것은 근거 없는 투사다. 나는 그를 모른다. 그러나 그러지 않고서야 이 영화의 감각을 설명할 방법이 내겐 없다. 156분 안에는 객석에 한 번이라도 앉아봤다면 잘라냈을 것들이 너무 많이 살아남아 있다.

위기 한복판에서 피어나는 유머러스한 장면과 대사가 관객석에서 어떻게 느껴지는지, 나는 이번에 몸으로 배웠다. 작가의 책상에서는 재치였던 것이 객석에서는 소음이 된다는 것을. 그래서 다짐했다. 내 작품에서는 그런 류의, 특히 슬로 모션 같은 연출적 자기도취를 넣지 않겠다고. 그리고 결말까지, 여운이라는 핑계 뒤에 숨지 않고, 충실하게 쓰겠다고.

이상한 결론이지만, 그래서 '호프'는 내게 도움이 많이 된 영화다. 좋은 작품은 감탄을 주지만, 어떤 작품은 거울을 준다. 거울이 더 오래 남는다.

정체 불명의 벤티 사이즈 방탄 커피 — 노스포 후기에서 만든 한 잔
정체 불명의 벤티 사이즈 방탄 커피 — 노스포 후기에서 만든 한 잔

나가며 — 그 잔의 이름

다시 그 커피잔으로 돌아가자.

황정민이라는 에스프레소는 진하다. 그의 범석은 이 난장판에서 유일하게 무게중심을 지키는 연기다. 차량 추격이라는 달고나는 그 자체로 달다. 게르투인의 비극이라는 기버터도 재료로서는 신선했을 것이다. 문제는 단 하나, 이것들이 한 잔 안에서 끝내 섞이지 않았다는 것. 시대극과 크리처 호러와 슬랩스틱과 우주적 비극이 각자의 비중으로 분리된 채 둥둥 떠 있는 156분. 흔들어도 섞이지 않는다. 그래서 방탄 커피다.

주문한 것은 아메리카노였다. 나온 것은 정체 불명의 벤티 사이즈 방탄 커피였다. 그래도 나는 이 잔을 끝까지 마셨고, 바닥에서 뜻밖의 것을 건졌다. 남의 실패는 언제나 나의 교과서보다 정직하다.

한 줄 요약. 경험 많은 작가가 야심차게 벌여놓은 무리한 설정을 결국 감당하지 못하고 서둘러 완결낸 작품 — 그러나 그 서두른 완결이 다른 창작자의 미완성 원고 하나는 구했을지도 모른다.

ps) 어울리지 않는 연기부터 갖가지 개그 코드까지 이 모든 것이 블랙 코미디를 향한 감독의 의도라는 점은 화면 곳곳에서 여실히 느껴진다. 다만 그 의도를 관객이 이해해주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다. 나는 이해했다. 이해했지만, 좋아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창작자에게 그 둘의 차이만큼 잔인한 피드백은 없다.

본문의 스틸컷과 포스터는 리뷰 목적으로 인용했으며, 출처는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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